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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사이온지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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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사이온지 내각은 1911년 8월 30일부터 1912년 12월 21일까지 480일 동안 존속했다. 사이온지 긴모치가 내각총리대신을 맡았으며, 우치다 고사이, 하라 다카시, 야마모토 다쓰오, 이시모토 신로쿠, 사이토 마코토, 마쓰다 마사히사, 하세바 스미타카, 마키노 노부아키, 하야시 다다스 등이 국무대신으로 임명되었다. 이 내각은 러일 전쟁 이후 재정난을 극복하기 위한 개혁을 추진했으나, 메이지 천황의 붕어로 중단되었다. 또한, 선거 제도의 변경을 시도했으나 귀족원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912년 두 개 사단 증설 문제로 인해 육군대신이 사임하고 후임자를 구하지 못하면서 결국 총사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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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사이온지 내각
내각 정보
내각 이름제2차 사이온지 내각
일본어 표기(다이니지 사이온지 나이카쿠)
대수14대
총리사이온지 긴모치
총리 전직입헌정우회 총재
성립 연도1911년
성립 날짜8월 30일
종료 연도1912년
종료 날짜12월 21일
여당입헌정우회
선거제1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해산1912년 5월 15일 (임기 만료)
수상사이온지 긴모치
사이온지 긴모치 수상
주요 인물
국가 원수메이지 (1912년 7월 30일까지)
다이쇼 (1912년 7월 30일부터)
국가 원수 직책천황
총리사이온지 긴모치
총리 직책내각총리대신
내각 구성
성립 일자1911년 8월 30일
해산 일자1912년 12월 21일
이전 내각제2차 가쓰라 내각
후임 내각제3차 가쓰라 내각
정당입헌정우회
의회
의회 임기1908–1912
1912–1915
선거1912년 총선거

2. 재직 기간

1911년 (메이지 44년) 8월 30일 ~ 1912년 (다이쇼 원년) 12월 21일)


재직 일수: 480일[1]

3. 내각 구성

제2차 사이온지 내각은 1911년(메이지 44년) 8월 30일에 성립되어 1912년(다이쇼 원년) 12월 21일까지 존속했다.[1] 내각은 국정을 담당하는 국무대신, 행정 사무를 담당하는 내각서기관장과 법제국 장관으로 구성되었다.

3. 1. 국무대신

제2차 사이온지 내각일본어의 국무대신은 다음과 같다.

직책대신정당임기 시작임기 종료
내각총리대신사이온지 긴모치 공작입헌정우회1911년 8월 30일1912년 12월 21일
외무대신우치다 고사이 자작무소속1911년 8월 30일1912년 12월 21일
하야시 다다스 백작 (사무 취급)무소속1911년 8월 30일1911년 10월 16일
내무대신하라 다카시입헌정우회1911년 8월 30일1912년 12월 21일
대장대신야마모토 다쓰오무소속1911년 8월 30일1912년 12월 21일
육군대신이시모토 신로쿠 남작군인 (육군)1911년 8월 30일1912년 4월 2일
공석1912년 4월 2일1912년 4월 5일
우에하라 유사쿠 남작군인 (육군)1912년 4월 5일1912년 12월 21일
해군대신사이토 마코토 남작군인 (해군)1911년 8월 30일1912년 12월 21일
사법대신마쓰다 마사히사입헌정우회1911년 8월 30일1912년 12월 21일
문부대신하세바 스미타카입헌정우회1911년 8월 30일1912년 11월 9일
마키노 노부아키 남작 (사무 취급)무소속1912년 11월 9일1912년 12월 21일
농상무대신마키노 노부아키 남작무소속1911년 8월 30일1912년 12월 21일
체신대신하야시 다다스 백작무소속1911년 8월 30일1912년 12월 21일

[1]

3. 2. 내각서기관장·법제국 장관

직책대수성명출신 등비고
내각서기관장16미나미 히로시내무성1911년 8월 30일 ~ 1912년 12월 21일[8]
법제국장관12야스히로 반이치로귀족원, 무소속 (차화회)내각은급국장, 1911년 8월 31일 면직[9][10]
13오카노 게이지로귀족원, 무소속내각은급국장, 1911년 8월 31일 임명[11][10] ~ 1912년 12월 21일


4. 주요 정책 및 사건


  • 행정·재정 개혁 - 러일 전쟁 이후의 재정난을 이유로 실시되었다. 번벌 측의 반발을 우려하여 비밀리에 진행되었지만, 메이지 천황의 서거를 계기로 중단되었고, 이후 재개되지 못하고 정권이 붕괴되었기 때문에 실현되지 못했다.[1]
  • 선거 제도 개혁 - 선거구를 소선거구제로 바꾸는 안이었지만, 입헌정우회에 더욱 유리한 제도가 되는 것에 번벌이 반발하여 귀족원에서 법안은 부결되었다. 현행의 대선거구제에서도 정우회의 유리가 변하지 않는 점도 있어, 제도 개혁은 최종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귀족원 내에 친정우회 회파인 교우구락부가 형성되어, 점차 귀족원에도 세력을 뻗어 나갔다.[1]
  • 두 개 사단 증설 문제 - 1912년, 야마가타 아리토모 수석 원로가 이끄는 육군벌은 내각·정우회 측과 예산 획득을 위한 조건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야마가타에게 미움을 받아 궁중직으로 좌천(사실상의 정계 은퇴)되었던 가쓰라 전 총리가 정계 복귀를 위해 우에하라 유사쿠 육군대신을 부추겼다. 결국 우에하라 육상이 사임하고,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에 의해 후임 육상을 얻지 못한 내각은 12월 5일에 총사직했다.[1]
  • 다이쇼 정변과의 연관성 - 가쓰라가 후임 총리로 복귀했지만, 번벌 타도 운동(헌정 옹호 운동)이 거세져 정권 유지가 어려워진 제3차 가쓰라 내각은 곧 붕괴되었다. 사이온지도 이어서 정우회 총재 직을 사임했고, 계원 시대는 막을 내렸다.[1]

5. 평가 및 영향

제2차 가쓰라 내각번벌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던 반면, 제2차 사이온지 내각은 입헌정우회와의 협력을 통해 정국을 운영해 나갔다(계원 시대). 그러나 번벌과 정우회는 정치 주도권과 이익 분배를 둘러싸고 지속적으로 대립하였으며, 고토쿠 사건 발각으로 번벌의 책임 문제가 불거지면서 갈등이 심화되었다. 정우회의 실질적 리더였던 하라 다카시는 정권 교체와 가쓰라 총리의 정계 은퇴를 요구했고, 결국 가쓰라 내각은 조약 개정 성공을 명분으로 퇴진하였다. 이후 정우회 총재였던 사이온지 긴모치가 가쓰라의 지명으로 총리에 임명되면서 1911년 8월 30일, 제2차 사이온지 내각이 출범하였다.[1]

제2차 사이온지 내각은 러일 전쟁 이후 심각한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행정 및 재정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번벌 세력의 반발을 우려하여 비밀리에 진행되었고, 메이지 천황의 사망으로 중단되었다가 결국 실현되지 못하고 정권이 붕괴되었다.[1]

또한, 선거 제도 개혁을 통해 선거구를 소선거구제로 변경하려 하였으나, 이는 정우회에 유리한 제도라는 번벌의 반발로 귀족원에서 부결되었다. 결국 선거 제도 개혁은 무산되었지만, 귀족원 내에 친정우회 세력인 교우구락부가 형성되면서 정우회의 영향력은 점차 확대되었다.[1]

1912년, 두 개 사단 증설 문제가 발생하였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중심으로 한 육군벌은 예산 확보를 위한 투쟁을 벌였으나, 우에하라 유사쿠 육군대신이 사임하고,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로 인해 후임 육군대신을 찾지 못하면서 내각은 12월 5일 총사퇴하였다.[1]

이후 가쓰라가 다시 총리로 복귀하였으나, 번벌 타도를 외치는 헌정 옹호 운동이 거세지면서 제3차 가쓰라 내각은 곧 붕괴되었다. 사이온지 역시 정우회 총재직을 사임하면서 계원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1]

참조

[1] 웹사이트 Second Saionji Cabinet http://www.kantei.go[...]
[2]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NDLDC 1911-08-30
[3] 간행물 『官報』第8499号「叙任及辞令」 NDLDC 1911-10-18
[4] 간행물 『官報』第8635号「彙報」 NDLDC 1912-04-05
[5] 간행물 『官報』号外「叙任」 NDLDC 1912-04-05
[6] 문서 병기료양 때문에 사임
[7] 간행물 『官報』号外「叙任」 NDLDC 1912-11-09
[8] 간행물 『官報』第8459号「叙任及辞令」 NDLDC 1911-08-31
[9] 문서 제2차 게이 내각의 법제국 장관
[10] 간행물 『官報』第8460号「叙任及辞令」 NDLDC 1911-09-01
[11] 문서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교수 겸임
[12] 문서 입헌정우회 총재, 귀족원 후작 의원인 사이온지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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